5, 6천년 전의 신석기 시대부터 염부인의 먼 조상들이 이미 황해 부근과 회하 양안, 사양호반의 좁고 긴 지역에서 일하고 번식하며 생활하기 시작했고 염성의 상고 문명을 창조하였습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선민들이 바다에 가까운 우세를 이용하여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생산해 냈습니다. 진해시대(秦漢時代)에 이 지역 사람들은 바닷물 끓여서 이익을 거두고 수로를 개척해서 운송을 소통시켰으며 자염과 제철 사업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이 비교적 많고 철제 농기구와 소갈이 기술의 사용이 비교적 보편적이었습니다. 한무제(漢武帝) 원수(元狩) 4년(기원전 119년) 조정에서는 고사양현(古射陽縣) 역내 동쪽에 황해와 가까운 일부을 돌려 현을 설치하였습니다. 여기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 소금을 삶는 장소와 소금을 운송하는 운하이어서 염독현(鹽瀆顯)이라고 불렀습니다. 동한 시대(東漢時代)에 부춘(富春:現 浙江省 富阳市) 출신한 손견(孫堅)이 허창(許昌), 허소(许韶) 부자 농민 봉기군을 평정한 공로로 염독승(鹽瀆丞)에 취임하여 사적에 먼 처음 나타난 염독승입니다. 그의 차남인 손권(孫權)이 나중에 오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동진 진안제(東晉 晉安帝) 의희(義熙) 7년(서기 411년) 염독현이 제염소가 도처에 널려 있어서 지명을 염성으로 바꾸었고 그때부터 염성시는 명실상부한 소금을 생산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염성은 소금으로 현을 설치하게 하고 또 소금으로 도시를 진흥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기나긴 시간에 염성의 해염 생산은 기술이 물론 생산량과 품질도 해염 생산 역사상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염성은 해염 문화로 세상에 유명하고 해염 문화는 이 도시 문명의 뿌리와 영혼입니다.